YCCL 칼럼

I’ll never know cause you’ll never show – 네트워킹과 네크워크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10. 5. 16:44
감수성이 한창 예민하던 시기에, 빌링슬리관 어느 교실의 벽에서 Ill never know cause youll never show 라는 낙서를 발견하고 마음속의 공명과 표현의 탁월함에 얼른 노트 한켠에 옮겨적은 일이 있다. 연애, 그리고 인간관계 일반의 밀고당기기 가 운율과 각운까지 갖추어 압축된 한 문장. 당시에는 왜 그는 나에게 그를 보이지 않아 나는 알 수 없게 하는가! 식의 신파에 가까운 안달이 주된 심리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이 문장이 나를 위로한다. 운영을 멈춘 트위터와, 그 이전에 문을 닫은 싸이월드와, 자료저장용으로 쓰는 비공개 블로그. 이렇게 네트워크에서 철저히고립된, 혹은 지난 네트워크의 흔적만 남은 나의 온라인 아바타들을 볼때마다 show 하기를 그만둠으로써 being known의 가능성을 끊은 나 자신의 쿨함에 놀란다. 그리고 시작은 쿨함을 흉내낸 것이었을지라도 실제로 위와 같은 상태가 지속된지 상당히 오래인데도 (원래의 예상과는 다르게) 더욱더 의연하고 홀가분한 마음이 반갑다.

 트위터를 비롯한 온라인 네트워킹 서비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은, 그것에 진정한 즐거움과 가치를 느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시간과 인지적 에너지를 기꺼이 투여할 필요를 느끼고, 필요를 절감하기 이전에 그들은 이미 트윗질을 하고 있다. 트위터라는 미디어를 통해 오고 가는 모든 메시지는 결국 정도의 차이를 가지는 자기 노출로 환원시킬 수 있으며, 이를 즐기는 이들과 즐기지 못하는 이들, 않는 이들, 즐겁다고들 하니 어디 한번 즐거워보려고 시도하는 이들 등등이 있는 것 같다. 나는 트위터라는 미디어의 파도에 큰 즐거움도 효용도 찾지 못해서 발을 빼기로 결정했으며, 거기에는 오프라인 인간관계의 안정화(사람들이 트위터를 그만두는 가장 큰 이유는 애인이 생겨서라고 한다.)라던가 고시공부를 시작한 것과 같은 나 개인의 상황적인 요인들이 많이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네트워크에서 고립된다는 표현은 뭔가 부정적이고 시대에 역행하는 뉘앙스를 풍기지만, 개인의 현실에서는 네트워킹의 귀찮음과 고뇌에서 해방되는 경제적 이점을 선사하기도 한다. 즉, 트위터를 하는 것이 영광이 아니고 트위터를 안/못 하는 것이 치욕이 아니다. 다만 우쭐해 하거나 소통의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우리들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