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CCL 칼럼

에로스트라트(Erostrate), 소통의 부재가 낳은 검은영웅에 대한 생각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7. 16. 15:48
 안녕하세요 아삼입니다.
햇살이 쨍쨍한 YCCG의 반가운 목요일날, 두 번째 글이네요.

 몇 일 전에 최장집 교수님이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을 보았습니다. '소통'에 대한 경향신문의 야심찬 기획에 조심스런 우려를 건네는 최장집 교수님의 글이라니. 이른 아침 펼쳐본 최장집 교수님의 글은 몇 일 동안 끊이지 않고 내리던 비 뒤에 느껴진 상쾌한 공기처럼 그렇게 반가웠습니다. 몇 번을 읽고 또 읽고 오랜만에 부족한 지식의 해갈을 경험하며 펜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안그래도 부족한 필력이 더운 여름날 수업과 나태함에 더 떨어져버린 것이 느껴지더라구요. 펜은 옮겨지지 않고 그렇게 주춤한 사이.

 마침 스캇님이 좋은 글을 남겨주신 걸 보면서 '아, 역시 글 하나조차 때가 있는 법'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 글에는 때가 있는 법입니다. 공부에도 때가 있듯이 말이죠. 그러니 저는 공부를 지금 열심히 해야만 하며, 글도 열심히 써야 하는데... 결국 이번에도 역시나 항상 하는 자조적인 다짐이 되는군요. 

 짧은 다짐은 가슴 속에 재워두고, 젊음을 머리를 채우는 데 더욱 불태워야 한다는 것을 되새기며 오늘은 살짝 재미있는 이야기를 소개해볼까 합니다. '소통'에 대한 극한의 상황,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는 이의 불나방같은 몸부림에 대한 이야기.


 '에로스트라트(Erostrate)'.
 이제부터 저는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의 단편 소설 <에로스트라트(Erostrate)>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고자 합니다.
Jean-Paul Sartre

 고대 그리스 전설에 따르면 에로스트라트(Erostrate) 또는 헤로스트라투스(Herostratus)는 고대 에페소스인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불멸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B.C.356년경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알려진 에페소스의 디아나 아르테미스 신전(건축가 미상의 신전으로 B.C.620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을 불태웠다고 합니다. 사르트르의 소설 <에로스트라트(Erostrate)>의 주인공인 폴 일베르 역시 반(反) 인본주의적인 파괴적 행위로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싶어하는 일종의 '검은 영웅'입니다. 폴 일베르는 에로스트라트가 위대하고 경이로운 신전을 불태우는 놀라운 범죄를 저지름으로써 그의 존재는 검은 상흔으로 새겨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그의 행동이 검은 다이아몬드처럼 지금도 빛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내 운명이 짧고 비극적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생각이 처음에는 무서웠지만, 이내 익숙해졌다. 어떤 점에서 그것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또 어떤 점에서는 흘러가는 순간에 상당한 힘과 아름다움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거리로 내려왔을 때, 나는 내 몸 속에서 어떤 묘한 힘을 느꼈다. 나는 폭발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는 이 물건, 권총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자신감을 얻은 것은 권총 때문이 아니라, 내 자신에서였다. 나는 권총, 폭죽, 폭탄과 같은 종류의 존재였다. 그리고 언젠가, 내 어두운 인생의 종착역에 이르게 되면, 나 역시 폭발해서 마그네슘의 섬광처럼 격렬하고 짧은 불꽃으로 세계를 빛내리라. 이 시기에 나는 며칠 밤이나 똑같은 꿈을 꾸었다."

- <에로스트라트(Erostrate)> 중에서
 
(장 폴 사르트르 소설집 <벽>,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저, 김희영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05)


 존재의 외로움을 범죄로 이겨내고야만 검은 영웅을 소통의 부재와 연결시켜 상상해봅니다. 소설에서는 일베르의 지인들이 한 명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가 누군가와 소통하는 장면은 창녀 르네와의 짧은 대화가 전부지요. 그는 직장에서 해고되고 난 뒤 범죄를 상상하며 저명한 프랑스 작가들에게 102통의 편지를 보냅니다. 인간에게 매력을 느끼는 그들의 작품들이 구역질난다고 하는 그는 가시돋힌 말투로 그가 '자신의 말'을 갖고 싶었다는 심정을 털어놓습니다.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자신은 비참한 존재이며 설 자리가 없다고 털어놓으면서도, 왠지 마지막 손길을 바라는 인상의 일방적인 편지를 부친 그는 이제 계획을 실행에 옮깁니다. 몇 발의 총성. 추격에 갇힌 그는 그의 추격자들이 건네는 말을 듣습니다. 자신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으며 단지 불멸의 존재가 되고 싶었다는 그.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입속에 넣은 권총의 방아쇠를 끝내 당기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의 추격자들에게 문을 열어줍니다. 총을 내던진 채로 말이죠.

 그는 문을 열고 누군가의 손을 잡았을까요. 저는 전공 탓인지 소설의 이 마지막 장면을 읽으며 그가 범죄를 통해 이루고 싶어했던 '불멸의 흔적'과 '소통'을 생각해봅니다. '세상에 내 흔적을 남긴다' '나는 그 흔적을 통해 불멸의 존재가 된다' '그것이 살인이라 할 지라도 나의 존재는 불멸이 된다'. 그는 결국 세상에 무엇인가를 남기고 싶어했고, 그가 생각한 세상이라는 존재는 결국 '타자'로 이루어진 사람의 집합체였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아닌 '타자'의 존재가 주는 시선. <에로스트라트(Erostrate)>는 들뢰즈(Gilles Deleuze)에 의해 '서구 철학사상 타자에 대한 최초의 위대한 이론'이라 평가받은 사르트르의 타자론이 짙게 스며들어 있는 소설이기도 합니다. 타자의 시선에 대한 문제는 결국 나에 관한 문제에, 그리고 인간에 관한 문제에 대한 답을 해나가는 과정이라는 것이 사르트르의 타자론이었습니다. 그리고 타자와 자신과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에는 역시 '소통'이라는 거대한 과정이 필수적으로 존재하게 되죠. 이런 맥락에서 소통은 인간 존재에 대한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철학적 대상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인간 존재의 가장 근원적 차원에서의 철학적 주제인 소통. 우리가 왜 그토록 소통에 다가갈 수 밖에 없는 것에 대한 또 다른 방향의 이유가 될 수 있겠죠.

 아아, 짧고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글을 썼는데 어쩐지 지루한 이야기가 되어버린 듯 합니다. 이제 까뮈(Albert Camus) 역작 <이방인(L'tranger)>의 영웅 뫼르소의 말을 빌어 짧은 글의 마무리를 해볼까 합니다. 뫼르소는 일베르와 같은 검은 영웅은 아니지만, 어쩐지 사형을 기다리는 그의 마지막 마음가짐이 다른 이들을 향한 소통을 갈구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누군가의 앞에서 자신의 마지막 길, 마지막 소통을 하고 싶은 욕망. 이래나 저래나 문제는 역시 소통입니다.

 "이 세상이 그처럼 나와 동일하며 형제 같다는 생각에 나는 행복했으며, 또 지금도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기 위해서, 그리고 내가 외롭지 않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 내가 바라는 마지막 소원은 내가 사형을 당하는 날 보다 많은 구경꾼들이 나를 증오의 함성으로 맞아주었으면 하는 것뿐이다."

- <이방인(L'tranger)> 중에서
(알베르 까뮈(Albert Camus) 저, 김화영 옮김, 민음사, 1987)